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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zealand.com
비교적 역사가 짧은 뉴질랜드지만 그 역사는 매우 풍요롭고 매력적이며, 마오리 원주민과 유럽인의 전통이 한데 녹아 있다.
뉴질랜드 역사는 크게 마오리 역사와 유럽 정착민 역사로 나뉜다.
약 천년전 와카 (마오리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처음으로 뉴질랜드에 발을 딛은 마오리의 이름은 쿠페. 쿠페가 처음 도착한 곳은 노스랜드 지역의 호키앙가 항구 부근이라고 알려져 있다.
쿠페 이후 하나 둘 뉴질랜드에 들어온 마오리는 이위(iwi)라고 부르는 부족을 만들었고, 낚시와 사냥을 통해 부족을 키워나갔다. 낚시는 마오리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마오리 신화에서도 자주 등장하며, 대부분의 이위가 해변에 그 터를 만들었던 것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도 마오리들은 낚시를 할 때 첫번째 잡은 물고기를 뒤로 던져 버리는 전통이 있는데, 이것은 바다의 신인 탕아로아에게 풍작에 대해 감사하기 위함이다.
마오리족은 뉴질랜드의 자생 야채를 먹었으며, 또한 쿠마라(고구마) 같은 새로운 야채를 폴리네시아로부터 들여오기도 했다. 다른 음식들로는 여러가지 열매와 푸하 (시금치 같이 생긴 야채) 등이 있으며, 거대한 카우리 나무에서 채취한 고무의 수액을 껌으로 씹기도 했다. 아마로 짜여진 바구니과 가방들이 음식을 운반하는데 이용되었으며, 음식은 '파타카'라고 불리는 저장되었다.
지금도 사용되는 기발한 방식의 요리인 '항이'는 누구나 꼭 맛보아야 하는 특별한 음식.
'항이' 또는 '우무' 라 불리는 이 방식은 땅에 큰 구멍을 파서 만들어진 땅속 오븐에 나뭇가지로 지펴올린 불위에 특별한 돌을 얹어 달군 후, 돌 위에 아마의 녹색잎들을 층으로 얹고, 그 위에 고기와 야채를 아마와 층을 이루며 사이사이에 올려놓고, 거적으로 덮는다. 그리고 뜨거운 돌위에 물을 뿌려 그 증기로 음식이 익힌다.
나무와 아마의 향이 음식과 융합하여 아름답고 섬세한 훈제의 향기가 음식에 배이도록 천천히 요리를 하면 부드럽고 맛좋을 뿐 아니라 건강 및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일품.
다른 부족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마오리족들은 파 (요새화된 마을)를 건설하였으며, 파는 대게 언덕 꼭대기나 산등성이등 전략적인 장소에 세워졌다. 지금도 파의 모습을 뉴질랜드 전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오리는 뛰어난 전사들이다. 남자들만 전투에 참가하였고, 가장 귀하게 쓰인 무기중의 하나가 창처럼 생긴 '타이아하'로, 지금도 마오리족의 의식에 사용되고 있으며, 지금은 그 용도가 세련된 예술의 한 형태로 자리잡았다. 다른 무기로는 포우나무(뉴질랜드 옥)로 아름답게 조각된 메레(곤봉)가 있다.
마라이 (Marae)는 마오리 부족들의 중심이었으며, 현재에도 마오리 사회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으로, 말하자면 마을회관과 비슷한 곳. 마오리어로 큰 집이라는 뜻의 '화레누이'는 회의를 하는 건물을 말하는데, 마라이 한 가운데 자리잡는다.
뉴질랜드를 처음으로 발견한 유럽인은 네덜란드의 탐험가인 아벨 태즈만이었다. 1642년에 처음으로 뉴질랜드를 발견한 아벨 태즈만은 이 땅을 '스테이튼 랜드'라 명명하고 홀란드(네덜란드)에 합병시켰다.
아벨 태즈만이 마오리족을 처음으로 만난 곳은 골든 베이. 아벨 태즈만의 보트가 마오리 카누에 부딪히면서 여러가지 오해들을 야기시켜, 작은 충돌이 일어나면서 선원 네명이 죽는 사태에 이르게 됐다. 결국 그는 뉴질랜드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다.
영국인인 제임스 쿡 선장은 비너스(금성)가 자오선을 통과하는 것을 관찰하도록 타히티로 보내졌으며, 또한 남쪽의 대양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던 거대한 남쪽 대륙을 찾아야 하는 임무도 있었다. 항해 중 쿡 선장의 선실 사환이었던 어린 소년 닉이 1769년에 기스본 가까이에 위치한 한 조각의 땅을 발견했는데, 이 곳이 현재 어린 닉의 머리(Young Nick's Head)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쿡 선장은 성공적으로 뉴질랜드를 주항했으며 지도를 작성했다. 그의 식물학자들과 다른 전문가들이 그의 함선 인데버 호(the Endeavour)에 같이 승선하였으며, 뉴질랜드의 식물군과 동물군, 그리고 마오리 원주민에 대한 상당한 자료들을 수집했다. 쿡 선장은 1779년에 하와이의 해변에서 살해되기 전까지, 두번 더 뉴질랜드를 찾았다.
1840년 이전에는 주로 고래잡이와 물개잡이, 그리고 선교사들이 뉴질랜드로 이주했으며, 정착자들은 특히 해변 지역에서 마오리족과 상당한 접촉을 해왔다. 마오리족과 파케하(유럽인)는 광범위한 교역을 했고, 몇몇 유럽인들은 마오리족들 사이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마오리 부족간의 충돌이 잦았고, 마오리가 파케하로부터 총기를 사게되면서 전쟁의 규모가 커졌다. 게다가 서양에서 옮겨져온 새로운 질병으로 많은 마오리가 목숨을 잃으면서 그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게됐다.
1840년 마오리 부족이 나라의 통치권을 영국 왕실에 넘긴다고 동의하는 와이탕기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영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급격하게 증가하게 되었다.
뉴질랜드의 구조적인 식민지 개척은 대부분 에드워드 기본 웨이크필드(Edward Gibbon Wakefield)의 아이디어에 의해 기초되었으며, 그는 식민지의 개척은 영국사회의 구조를 모델로 해야 한다고 믿었다. 많은 뉴질랜드의 도시가 영국을 기본으로 설립됐다.
더 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오고, 그들이 땅을 더 요구함에 따라 마오리족과 영국인 사이에 땅 분쟁이 증가하게 됐다. 와이탕기 조약의 애매 모호한 해석과 지지의 결여로 인하여 불만이 증가했고, 사소한 충돌이 늘어나게 되면서 1840년대 중반에 북섬에서 큰 규모의 전쟁이 일어났으며, 다른 지역들에서는 1860년대에 마오리와 파케하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땅에대한 전쟁 동안 마오리족은 많은 접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북섬의 오해와이 파 (Ohaewai Pa)의 방어같은 몇몇 전쟁에서 마오리족의 전술은 상당히 교묘함을 보여주었고, 종종 유럽인의 전술보다 우세했다. 그러나, 식민지 군대는 그 수가 많았기 때문에 숫자의 힘에 의해 뉴질랜드의 전쟁은 마오리족들의 패배로 끝났다.
19세기와 20세기의 대부분의 시기를 통하여 영국의 '조국'은 뉴질랜드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정부의 행정, 교육 그리고 문화가 영국을 모델로 하여 설립됐고, 뉴질랜드 군대는 보어전쟁과 두차례의 세계전쟁에서 싸웠다. 당시 뉴질랜드 수상이었던 마이클 세비지는 1939년에 영국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영국이 가는 곳은 우리도 간다. 영국이 대항하는 곳이면 우리도 대항한다.'
뉴질랜드가 여전히 영국의 유산에 의해 강하게 영향을 받고는 있지만, 현재는 자신만의 강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영연방의 멤버이면서, 미국과의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뉴질랜드는 현재 교역과 외교에 대한 아주 독립적인 정책을 펴고있다.
1980년대 중반에 무핵지대가 되었으며, 군대 역시 기본적으로 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